카테고리 보관물: a critical essay

DR-BT22

  블루투스가 전송기능이 약해 음질이 나쁘다는 말이 많지만, 사실 몇년 전부터 나오고 있는 2.0 버전에도 이 말을 적용시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기기의가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스펙이니까요. 다만 실제로 음질이 나쁜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블루투스 기기 메이커들이 오디오 기기가 전문 메이커가 아니라는데 있죠. 반대로 아날로그인 오디오 기기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은 블루투스라는 디지털 기기를 접목시켜 작업과 사업의 범위를 넓힐 여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꽤나 오래전에 전통 아날로그 고집하다 여기저기서 쥐어터지고 여타 업체와 같이 쓰러질뻔 했던 SONY가 디지털 기술의 범위로의 힘든 확장이 성공하게 되면서 종전과 같은 먼져 도전하는 주자의 모습으로 되찾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놓는 여러 부류의 제품 중 하나가 바로 이 DR-BT22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블루투스 헤드폰을 몇가지 써봤지만 확실해 괜찮은 해상력을 가지고 있네요. 뜯고나서 음악을 재생시켰을 때는 “쿠엑”이라 외쳤지만 출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새 제품인걸 깜박했지 뭡니까. 조금 재생을 계속 시켜두니 훌륭한 음색입니다. 미약히 낮게 울려펴지는 배경음(저음 아님)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더군요. 요즘 귀가 많이 나빠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타 싸구려 기기로 소리를 들을 때 생기는 공허감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세미 오픈 형식이기에 어차피 소음을 막을 수 없으므로 사실 생각해보면 이정도는 과분한 해상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페이스도 귀에 부담이 가지 않아서 좋더군요. 일반적인 블루투스 헤드셋, 헤드폰의 경우 단추가 뻐뻑해서 귀를 꽈악 누르게 되어 미묘하게 기기가 눌려 귀가 아프거나 하는 현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DR-BT22는 귀와 대치하게 되는 전면의 단추는 전원과 전화를 위한 단추 두 개 뿐이고, 나머지 단추는 우측면 뒷쪽에 붙어있습니다. 음량은 일반 단추지만 음악의 제어는 조그 단추라서 음악을 제어할 때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활발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분은 기기가 떨어져도 붙잡아 줄이 없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활발한 다른 제품을 쓰시는게 좋습니다.

  한국에 정식 수입되기 시작한지 1년이 되가는 듯 싶은데, 종전의 9만원을 넘더 가격이 8만원 내외로까지 떨어졌습니다. 제가
이번에 구매한 제품이 2008년 6월인 불과 3개월 전에 제조(말레이시아)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딱히 재고가 쌓이지 않고 꾸준히
팔리는듯합니다. 앞으로 새 제품이 나올만한 시기와 가격을 고려해볼 때, 새 블루투스를 써보려 한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하네요.

  마이크 기능은 실외에서 쓰기엔 좀 곤란한 편입니다. 일반 헤드폰 생김새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인지, 마이크가 측변 바깥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이크 성능 자체는 나쁘지 않아 “대체 뭐라 지껄이는거냐. 소리만 크고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말은 안듣겠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좀 크게 얘기해봐.”라는 말은 분명히 들을 겁니다. 근데 실외에서 크게 소리치며 말할 순 없죠. 마이크 위치 완전 논센스예요.

SONY DR-BT22

Code Geass 종영.

안녕, 를루슈. 안녕.

Q.) 대체 R2가 나오면서 신쿠가 한게 대체 뭡니까.
A.) 수많은 인물이 어느순간 정점을 향해 하나씩 모이고 행동해갈 때 역사는 새겨집니다. 신쿠 또한 그런 수많은 인물의 하나일
뿐이지요. 를루슈의 기어스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말인 흑의 기사단이었지만, 를루슈와의 결별을 통해 서로가
추구하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뿐입니다. 그가 존재하기에,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라는
퍼즐이 맞는겁니다.

Q.) 유일황제 맞군요!! 제99대 유일 동정 황제 를루슈
A.) 정을 나눈 인물이 있다면 24화에서 C.C.가 를루슈와 침대에 앉아 대화 후, 기대앉아 손을 잡는 부분 후 뿐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문제 많았던 학생 생활 중에 정없는 관계를 나눴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생활은 아무도 모르지요.

The Kingdom

  다른 분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참 괜찮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간단히 말하면 관객에게 단 한 문장 말해주기 전에 수많은 우여곡절과 난투를 보여주는 건데, 사실 이 한 문장을 이해시키기 필요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여느 관객은 “뭐야, 이 얘기 한 마디 하려고. 내용이 없넹.”라며 한 문장 뿐이 영화의 내용에 실망하고 나가지만 영화 내내 보여줬던 장면 없이는 그 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The Names Bond…James Bond. Casino Royale.

  카지노 로얄을 이번에서야 보게 되었다.

  예전에 이 영화가 최악의 상 중 하나를 받았다길래 사람들이 원하는 제임스 본드는 역시 인텔리 인텔리전스 에이전트인가보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람들의 그런 기대는 진짜 더글라스 세븐의 모습이 아닌 듯하다. 사람들은 서서히 쇠퇴하며 추락해온 총 조차 제대로 겨눌 줄 모르는 날아오는 어쩔 줄 모르는 제임스 본드가 더글라스 세븐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절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힐 수 없는 기혼 여성이 편한 작업남.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의(요새의) 본드처럼 임무가 부업이고, 여자가 본업인 잠자기 바쁜 마치 파일럿 같은 잘나가는 에이전트가 아니다. 이번의 그에게 있어 여자는 임무의 연장선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단련된 육체와 판단력과 주의력 그는 살인면허인 더글라스를 가지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여럿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더글라스 세븐으로 성장해나간다.

  영화는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황홀한 여체가 춤을 추는 오프닝을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진짜 ‘에이전트’는 무엇이며 ‘더글라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그의 활약이 단순한 원맨쇼 뿐만이 아닌 조직의 백업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이런 점은 기존의 원맨 액션 영화가 이미 대세가 아니라 는 점에서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이 007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마치 미션 임파서블이 타협을 보고 멋진 3탄으로 돌아온 것과 같다고나 할까?

  여튼 간에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는데, 마치 새로운 해석으로만 보이는 이번 편이 사실은 ‘매우 고전적인 007’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동료만 믿고 굳이 본드가 없어도 될 것같은 곳에서도 날라리같이 날뛰기만 하는 요상한 본드가, 예전처럼 다시 접촉이나 수사를 위해서 건물에 들어설 때면 먼져 온 다른 에이전트가 그를 인도해주고, 그가 절벽으로 둘러싸인 설산에 잠입해 있다면 그를 위한 장비와 정보를 위해서 절벽까지 오르는 동료가 있는가하면 동료의 배신도 고려해야하는 것. 냉혈하고 모든 것은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로 생각하는 듯 싶지만, 악인의 죽음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충격받은 사람을 말없이 위로해주고, 사랑에도 빠지는 냉혈한이 아닌 뜨거운 마음을 지닌 자로 돌아온 점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007 시리즈의 특별한(잘나가는 인텔리) 점이 다 없어진 여타 영화와는 다른 특별한 점을 잃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는 잃은 것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본드의 복장이 복장이 하와이식(?) 셔츠로 시작해서 턱시도를 거쳐 마지막에는 완벽한 슈트로 탈바꿈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본드는 성장한 것이다. 예전의 본드가 그랬듯이, 자신이 미워하는 악인의 손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그는 마침내 진정한 더글라스 세븐으로 거듭난다.

Windows Live writer

  흐음.. <라이브 메신저>를 설치하면서 <라이브 라이터>도 설치해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 글을 작성 중이다.

  어차피 웹-로그가 설치된 서버 엔진에 의존하기 때문에 .NET처럼 쉽게 강력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HTML규격에 맞추는 것인지라 일반 위지윅 모드와 딱히 다를 바가 없어보인다. 라이터로 작성하면 엄청난 자바스크립트 따위를 통한 신공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TC의 플러그인을 사용하지 못해 손해보는 느낌?

장점이라면 위지윅 모드로 작성하는 것보다 웹 규격을 잘 맞추는 듯 하긴 한데……. 뭐, 기호도 자동으로 엔티티문자로 변환시켜주니 이런 것만으로도 사용할만하다고는 말할 수 있어보이네.

SKT

ALT
  카스카님의 강력한 추천에 1권은 새책으로, 나머지는 중고로 전권 사들여 읽게 되었다.
  장르는 환상문학. 시대는 대략 근대기에 들어서는 시점인 듯하다. 주인공은 막 20세를 갓 넘긴 젊은 전직 호스트로서 어렸을 적부터 꿈꿔오던 기사가 되고자 추천장을 들고 왕성을 향한다.
 대외 행사 및 홍보, 잡역꾼이라는 (허울 좋은)기사라는 소재는 의외로 꽤나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대량생산되는 환상문학 대부분의 주제와 소재가 현실감에서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 있어, 독자가 세계에 관한 체념과 본래(현실) 세계를 깨닫게 하는데 비해서, 이 소설은 왠지 있을법한 사건과 세계를 다루고 있다. 세계는 다르지만 우리와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상문학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듯하다.
  이 세계는 아신 이라 불리우는 기적을 일으키는 인물이 있지만 동서남북 4명 뿐,신기를 다루는 자는 없다. 마법처럼 보이는 텔레파시 기술도 있지만 뜯어보면 인간의 잠재능력(설정)을 이용할 뿐이다. 먼치킨과 같은 영웅은 있지만 그들이 죽지 못하는 존재는 아니다. 이러한 정연된 충분한 요소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인물은 읽는이에게 소설 속에서 현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감각은 현대 독자들이 작품에서 느끼고 바라는 점인데, SKT는 이를 충족시켰다. 같이 생산된 다른 작품보다 앞서있는 새 시대의 작품이다. 물론 이것이 장르 문학의 생산 시스템에 걸쳐 이미 결정된 이 책의 숙명까지 바꿀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역시 등장인물에 있는 것 같다. 하나하나 살아 있는 캐릭터! 현실감을 빼두고서라도 하나의 존재로써 톡톡 튀는 캐릭터들이다! 사악한 수호자 철혈대공 아이히만, 과묵과 기사도 카론, 무신론 성자 오르넬라-성녀, 단순함의 미학 무라사, 코스튬 플레이 차일드 알테어, 남성의 이상형 위고르 그리고 기타 등등. 서로의 몸와 마음, 생각을 가진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 각기 행동한다. 이것이 단순히 사건의 발생을 위해 의도되었다 할지라도 이로 인해 캐릭터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세계는 넓고 사람은 많다. 재밌고 많은 얘기를 전달하려다 보니 생기는 먼치킨 캐릭터는 피해가지 못했지만 나름 근거를 통해 흔적을 없애려 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주인공 엔디미온 만큼은 오히려 이러한 점을 못느끼겠다. 1인칭(엔디미온) 시점의 소설임에도 그 만큼은 튀어보이지도, 나아보이지도, 사건의 현장에 있어도 그 중심에 서 있지는 않아 보인다. 마치 관찰자 같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일까하는 의구심까지도 든다. 단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하여 쓰여진 가상의 인물처럼. 마지막 책을 덮는 순간 엔디미온은 이야기꾼으로써 매우 충실한 캐릭터이며 모든 사건의 부외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에 끼어들어 관찰할 뿐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가 없어도 이야기는 진행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는 내내 꽤나 마음에 눈에 거슬렸던 점이 하나 있는데,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살인하지 않는 주인공 또는 히로인이라는 형식이다. 주위에서(인물, 사건)는 그렇게나 살이 잘리우고 피가 솟구쳐도 마지막의 해피해지는 순간까지 고객(관객)에게 선물해줘야할 대상이니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게하여 깨끗한 새하얀 맛을 주려는 듯 보호되는 것이다. 이런 미학은 내게는 안맞다. 허접한 작품에서나 보이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까웠다.
  읽으면서 마치 영화의 신scene처럼 장면장면 단위로 전개가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오랜만에 읽는 번역판이 아닌 원어가 한국어인 소설을 읽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작가의 실력은 같은 계열의 다른 작가(대량의 초판1쇄만 찍히는 작가)와는 당연 비교를 거부해야 하겠다. 이 정도 글발이면, 이 소설은 휘날리는 타법으로 타자기와 인쇄기가 활자 찍듯이 쓴 책은 아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분이시다.
  간만에 낄낄거리며 책을 읽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꾼 그대의 길에 별이 빛나길!

천원돌파 그렌라간 #27 完


  ‘하늘의빛은 모두 적’에서 ‘하늘의 빛은 모두 별’로…….
  결국 1화의 첫장면은 해소되질 못했네요. 다만, 중요치 않은 장면이 되었습니다.
 
  안티 스파이럴 마지막 모습은 1999년 인류 멸망의 앙골라 대마왕이 컨셉?

천원돌파 그렌라간 #26

  역시……. 계속 머릿 속 언저리에서 부타가 부관인가 해왔는데 정말인가 봅니다. 1화의 장면은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얘기란거겠죠?
  다원우주. 이번 편을 보고 《스타 트렉》의 피카드 선장이 떠오르는 것은 저뿐일까요?

아니메 :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 8장.

  대부분이 느끼는 현실적(인 상황)인 보수적인 세태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시대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실 현실의 봉인 판타지라는 것은 알겠다.[footnote]Sujan J. Napier, {아니메 :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 임경희,김진용 공역 (루비박스, 2005), 8장-로맨틱 코미디의 카니발성과 보수성.[/footnote]
  그렇다면, 나아가서, ‘보수=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면 사실,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래를 꿈꾸는 자야 말로 진정한 리얼리스트이자 진보자인 것인가? 다수에 의해 몽상가라고 덮어씌어지고 있을 뿐. 사실은 현실을 변화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보수자야말로 이치에 맞지않는 몽상가일까?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이라 했던 것처럼.

  옛 질서의 부활을 부르짖는 보수적인 욕망. 요즈음의 아니메는 더욱 더 위험하다. 신세계가 여성에게 부여한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아니메의 경우 많은 방식으로 표현 되고 있다. 재능, 변신, 마법, 공상 구현을 이룩한 신과 같은 존재) 그 능력은 남성의 능력(포용, 통찰) 안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옛 여성성을 파고 들어 통째로 삼키려고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생각으로 떠올랐든 아니든) 간에 이러한 플롯은 어디에나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되고 있다.
  뭐, 이런 결과물들을 가지고 이성 간의 세력 구도 따위로 이해하는 것은 과대한 바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아니메의 수요가 (아주 좋게 봐줘서 판타지의 회복성[footnote]John Ronald Reuel Tolkien, {On Fairy Stories}, ,6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어린이에게.[/footnote]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수 수요자인 남성에게 상상 속의 자신에게 완벽한 히로인을 부여하기 위한 필연적이 이유로 사용됬을 뿐이겠지. 어… 그래도 문제는 이 생산물이 (모든 작품 들이 그렇듯이)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는것일까나.
  나는 이 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시끌별 녀석들》의 전화형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시리즈가 아닐까 한다. 비록 이 시리즈가 결말이 난 것은 아니지만 매 작품의 구도는 엇비슷하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시끌별 녀석들》의 주인공 여성 라무는 마법의 능력을 부리는 초인이고 이곳 저곳에 능력을 사용하지만, 좋아하는 남자인 아타루를 위해서가 대부분이다. 요컨데 능력은 있지만 남자를 위해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주인공 여성 하루히는 자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고 재구성 하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의 발현은 주인공 남성인 콘타로(이하 쿈)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제멋대로 일어난다.
  그러나, 능력에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보호가 고려되어 있어 하루히 자신의 능력이 폭주하는 것을 막는 임무는 (자신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는 수많은 유능한 존재를 가볍게 재치고서) 쿈이 맡게 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위해 세계의 주요한 조직 대표가(SOS단원)가 활발히 움직이며, 오히려 반하기까지(혹은 그러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쿈은 특별한 능력이나 권력이 없음에도 이끄는 자로써의 재능(성품과 직관, 수행력?)을 이용해 하루히를 통제한다. 요컨데 능력도 있고 제멋대로지만, 균형을 맞출 줄 아는 반려자에 의해 통제 됨.
  일본(문화가 비슷한 한국도 포함해) 어느 젊은이도 《시끌별 녀석들》을 현실스러움으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세기가 변했음을 알고 있다. 비록 그러한 연애물을 즐겨보기는 해도 말이다.
  그러나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는 다르다. 남성이 물리적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사람(특히, 여성)을 굴복시키지 않는 성숙함을 가지게 된 것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매운 주먹을 휘두루고 협박까지하는 과격함이나, 잘나가는 집안의 유능하고 유쾌하며, 호탕하기까지도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러한 충분히 현실적인 존재와 엮이면서도(판타지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현실의 한 부분이다[footnote]아즈마 히로키, 파우스트 (무크).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footnote]) 남성이 무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요한 존재임을 부각시켜준다는 점이 시리즈가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옆으로 새서 다른 원인도 말해보자면, 가볍고 발랄한 전개를 통하면서도 즐거운 교양 철학 사고를 동반한다는 점. 이를 응용해 한 발 더 나아가 미숙하긴 하지만 미스터리 요소를 부여하여 다른 장르 선호자까지 포옹했다는 것일까나.
  덕분에 가장 인기가 많은 장르의 하나인 학원물을 가장한 판타지물인지, 판타지물을 가장한 학원물인지 애매모호하게 보이긴 하지만 분명히 후자다. 에.. 아마도.

  그런데…….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두 주인공의 성별이 서로 바뀌어 나왔다면 어떤 논의가 나오게 됐을까? 머리가 아파서 이만.

Ghost in the shell: Innocence

  Innocence에서 고스트 카피 안드로이드가 이상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고스트를 가지게 되어 자신들이 괴롭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고스트를 잃게 되는 인간들이나 고스트를 얻게 되는 인형들. ‘불행한 것은 인간 뿐만이 아니라 고스트를 짊어지게 되는 인형 또한 같다.’라고 오시이는 작품에서 얘기합니다.
  작품은 여기까지.
 
그것에서 나온 제 해석은, ‘고스트(라는 괴로운 짐)를 짊어지는 것은 인간이면 되었다.’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