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별 글 목록: 2004년 7월월

Twin spic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오미 케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밖에 모르고 인생을 끝내는 게 좀 억울해
아폴로호가 달까지 가서 찍어온 사진을 봤을 때
왠지 야릇한 기분이 들었어
달세계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구나
그곳은 실제로 있는 곳이구나, 하고
나도 달에 가 보고 싶어
달에서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
그런 꿈을 꾸면서
저는 우주비행사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스즈키 슈

내가 우주에 가고 싶은 건 거기에 우주가 있으니까
거기에 별이 있으니까
이유가 안 된다구?
그래도 좋아
난 처음부터 준비된 건 갖고 싶지 않아
갖고 싶은 건 아직 아무데도 없는 것
성질이 그러니까 할 수 없어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별을 보고 싶어

멀리, 더 멀리..

왜?

  버진을 ‘버린다’. 동정을 ‘버린다’.
  솔직히 난 이해가 안간다. 왜 ‘버리는거’냐고???
  난 그 표현이 상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싫다. 그리고 그걸 ‘버리지 못한’ 사람에 대한 대우 풍토도 생겨나는 것이 짜증 난다. 버린다는 표현을 듣자니 정말 犬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 간의 교제에서 성관계에 반대한다거나 혼전순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성욕이 인간의 생리적 욕구라는 것과 쾌락을 즐길 권리는 본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소위 종교를 가진 사람과 금욕적 도덕관을 가진 이들이 사회에 순결을 ‘강요’하곤 하지만, 현 사회의 인간은 자유와 권리를 해석할 줄 안다. 마땅히 개무시해줄 만하다.
  하지만 이 자유주의가 어설픈 자유를 말하는 이들에 의하여 점점 역전되고 있다. 자유를 마음 껏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은 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잃다’, ‘바치다’라는 표현이 지금은 ‘버리다’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에.. 말하려는 바가 흐려졌는데, 결국 말하려는 바는 동정인 자들에 대한 우월감을 표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멍청한 자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동정이건 아니건 상관할 바가 아닌데 말이다.

아. 나 자신을 저주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악한, 정말 쓰기 힘든 상황에서는 쓰겠다고 모든 업무 다 내팽개치고 발악하면서 쓰는데..(당연히 잘 써질리가 없다. 주위 시선이 왔다갔다 한다 생각해 보라.)
  호기를 얻고, 모든 준비물이 충족되니까 정작 딴짓을 하고 있다.
  오, 신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딱 한 번만 시간을 되돌려주세요.
  인생도박한답시고,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근성없는 내 자신이 짜증 난다.
  패배자가 되기 싫지만, 노력하기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았는데도 반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구세기의 꿈은 흘러만 가는가..

그림의 출처는… 아쉽게도 모르겠음.

무등을 보며

  서정주씨의 시는 참으로 묘하다. 일단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의 탁월하다 못해 천재적인 글 솜씨에 감복받아 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게 끔 만든다. 그의 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의 글은 마치 주술같다. 주술은 처음에는 그것이 진리이거나 진실로 비춰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 효력이 떨어지고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등을 보며’도 그렇다. 뛰어난 어휘력에 감명을 받아 “나는 이 시에 대하여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냉정을 되찾음에 따라  ‘현실’이 가려지고 감춰졌다는 것을 알았다.
  먼저, 이 시는 서정주씨 6.25직 후, 조선대학교의 교수로 있을 때 쓴 것인데, 이 때가 서정주씨에게 있었던 최초의 궁핍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 시인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극단적 정신주의가 오히려 있는 자의 사치로 보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시는 절대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서정주는 가난은 누더기 같은 것이고, 누더기는 벗어버리면 그만 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누더기는 이미 절대 벗을 수 없는 한 몸과 같다. 이 시는 누더기를 걸친 채 남들 앞에 서본적 없는 자의 말인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누더기를 거친 채 남들 앞에 서본 적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