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memo.

아. 나 자신을 저주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악한, 정말 쓰기 힘든 상황에서는 쓰겠다고 모든 업무 다 내팽개치고 발악하면서 쓰는데..(당연히 잘 써질리가 없다. 주위 시선이 왔다갔다 한다 생각해 보라.)
  호기를 얻고, 모든 준비물이 충족되니까 정작 딴짓을 하고 있다.
  오, 신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딱 한 번만 시간을 되돌려주세요.
  인생도박한답시고,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근성없는 내 자신이 짜증 난다.
  패배자가 되기 싫지만, 노력하기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았는데도 반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구세기의 꿈은 흘러만 가는가..

그림의 출처는… 아쉽게도 모르겠음.

무등을 보며

  서정주씨의 시는 참으로 묘하다. 일단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의 탁월하다 못해 천재적인 글 솜씨에 감복받아 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게 끔 만든다. 그의 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의 글은 마치 주술같다. 주술은 처음에는 그것이 진리이거나 진실로 비춰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 효력이 떨어지고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등을 보며’도 그렇다. 뛰어난 어휘력에 감명을 받아 “나는 이 시에 대하여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냉정을 되찾음에 따라  ‘현실’이 가려지고 감춰졌다는 것을 알았다.
  먼저, 이 시는 서정주씨 6.25직 후, 조선대학교의 교수로 있을 때 쓴 것인데, 이 때가 서정주씨에게 있었던 최초의 궁핍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 시인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극단적 정신주의가 오히려 있는 자의 사치로 보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시는 절대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서정주는 가난은 누더기 같은 것이고, 누더기는 벗어버리면 그만 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누더기는 이미 절대 벗을 수 없는 한 몸과 같다. 이 시는 누더기를 걸친 채 남들 앞에 서본적 없는 자의 말인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누더기를 거친 채 남들 앞에 서본 적은 없지만..

뒤죽박죽

  새롭게 쓸만한 글들이 꽤 되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습이 답답하고, 머리는 어지럽다. 뭔가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기분. 메스껍다. 현실과 같은 감각이 나지만, 묘하게 존재감이 없는 듯한 느낌. 요즈음 이런 현상이 너무 잦다.
  무기력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간다. 아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공상인지 모르겠다. 머릿 속이 뒤죽박죽이다.

내가 글을 쓰기 전에 느끼는 것.

  나는 글을 쓰려고 하는 기간(필살의 영감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나만의 독자적인 사고가 성립되 었을 때)에 다른 이들의 글에 손을 대는 것(읽는 것)이 굉장히 두렵다. 왜냐하면 어느샌가 내가 그 작품에 영향을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향을 받지 않고 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어도 최근에 접한 가슴 속에 남아있는 사고의 영향은 끊을 수 없다. 만약 읽으려는 책이 쓰려는 주제나 이야기가 연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더욱 위험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렇다.
  책을 써야함과 동시에 읽어야 할 때마다 내 마음은 마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듯하다. 손에 잡혀 있는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기 힘들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순수하게 자신의 영감에서 흘러나오는(오염 또는 감염되니 않은) 글을 쓰려면 절대 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대부분은 결국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간에 공백을 두게 된다. 그렇게해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긴장감은 식어버리고 결국 몇 줄만으로 ‘앞으로 써 볼만한 항목’에 쳐박하게 된다. 그렇게 된 시나리오와 구성은 10여개를 훨씬 넘는다.

  이런 때에는 책을 불태우지 않는 이상은 안되는 것인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 대화하고 싶은 사람

문학계의 센세이션이 되어주세요, 리사씨.
당신은 일본에서, 나는 한국에서 이렇게 사이좋게 일을 벌렸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목표를 잃지 않게 붙잡아 준 사람.
동류의 피가 느껴지는 사람.

와세대 대학에 쫓아가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하지만 근성 부족으로 내 평생 못갈지도 모른다.

게을렀던 나의 2년을 뒤돌아 본다. 어째서 한 권도 쓰지 못했을까.. 하드 디스크를 날렸다는 핑계를 될 뿐이다.
 어째서 지난 2년 동안 쓰지 않았는지 정말 후회될 따름이다.

……. 그래서 수능이라는 것이 있지만, 불태워서 다시 써보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그 살얼음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기회는 5개월도 안남았을 것이다.

잡글록에서 글을 또 꺼내게 될 줄이야.

어른이란 단어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만든 단어이며, 무능력자들의 자위와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단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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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에 썼던 글이네요.
상당히 문제 많은 것 같은데, 어떤 이유 때문에 이걸 올리면서 생각하길. 밑으로 달리게 될 답글이 두렵다는 겁니다. ㅡ_ㅡ

Stand Alone


이것은 한 방향으로 가는 일종의 암묵적 타협 또는 ‘동기화’와 같은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 거대한 네트웍간의 관계(Community)가 그 관계로 인하여 일종의 전체적인 동기화 현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죠. 이런 상태에 관한 대응으로, 특히 언어와 관련된 표현에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저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자국어가 있는데 외국어를 쓴다던지와 같이 대체되는 상황은 문제가 있겠지만, 그 밖의 상황에서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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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니 이것이 바로 Stand Alone 아닌가 해서 따로 보관하고 있는 글.

실감하는 글

글을 쓰려는 욕망에
실제로 글을 쓰는 행위가 따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글을 쓰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출처: http://www.blogin.com/blog/main.php?datX=00669563&keyX=numr&keyY=00429201

인정하기 싫은 것.

  방금 전에 한 선생과 출제된 문제에 관하여 토론했다.
  그 토론은 내가 – 또는 우리가- 분명히 진 것이었다. 문제의 출제 과정에 있어서는 우리의 말이 옳았을지 모르지만, 문제 자체에 있어서의 명제는 절대 반박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더 이상의 물의 제기는 의미가 없었다. 다른 인간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선생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착잡함 금치 못하겠다. 그 장소에서 말없이 있던 수많은 인간들은 선생의 문제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을 뿐더러 뭐라 한다 하더라도 깨끗이 무시할만한 것이다.
  나는 화가 난다.

블로그를 시작하고서의 첫 소감.

  블로그를 시작한 이후로 여러 분들의 블로그에 들락날락 거리며 북마크를 하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북마크 요청 쪽지를 보내기도 했지요.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남기고 또한 저 자신의 블로그에에 글을 받는 것이 기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글을 남겨 주시는 분들이 모든 글에 일일이 답변을 남겨주시는 겁니다. 게다가 여러 분들의 블로그에 가보면 각 글에 대한 답변에 또 한번 답변이 쓰여져 있습니다.
  서로에게 있는데로 답변을 달아주는 것이 블로그의 예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현상은 마치 저에게 암묵적으로 (답변을) 쓰라고 강요를 하는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듭니다. 이러한 느낌이 계속해서 든다면 제 자신이 블로그에 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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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여러분이 마음 내키는데로 써주세요. ^^;;; 내키는데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