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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시작하는 법.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 있던 내용이 떠올랐다.

  영국의 시골 농장에 살던 홀리는 언제서부턴가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산책로는 매우 짧았지만 그 거리는 산책시마다 점점 길어졌고, 산책의 시간 또한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홀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은 거창한 계획과 각본으로 짜여져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자신과 가까운 곳을 거니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든지 홀연히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여행이다.

  걷고 싶다. 수레를 끄는 줄을 허리춤에 매고 무한히 걷고 싶다. 능선을 타고 초원을 거닐고 싶다. 그러다 지쳐 쓰러져 의식을 잃고 쓰러지더라도 계속 걷고 싶다. 언젠가 반드시 그럴 일이 있으리라. 몽골의 초원을 거닐 일이 있으리라.

오늘은 몇 번이나 하늘을 보았을까요?
저 멀리서 왔지만 밤에만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가치를 아는 그들을 본 적이 언제 였을까요.


새벽에 잠이 깨어 밖에 나가본 적이 있나요?
낮엔 회빛 그늘에 늘 가려있어 보이지 않지만
새벽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밤의 주인들을 만나세요.


지난 수 천 년간, 태고의 전설적부터 인간의 영혼을 매혹해온,
그 수를 세려 하는 것조차 위광에 해를 입히는 것만 같은
별의 바다, 별의 세례.

—–
  쓴지 1년이 되어가는 시. 이것 이후로는 별달리 마음에 드는 시를 쓴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쓰지 않는다.

무한 정보교류사회로 가는 길. -1

  과거의 Blogger들은 자신이 이용하는 회사의 서비스 사용자들과만 주된 교류를 가졌다. 그 이유는 사용자들도 그리 폭넓은 관계를 원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또한 상호 간의 범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독립적인 system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넓어보여도 한정된 – 자유롭지 못한 – 범위 안에서의 교류만을 해왔다.
  하지만  현재은 상황이 다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블로그의 사용자들은 더욱 많아졌고, 그 용도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그에 따라 사용자들은 훨씬 더 넓고 자유로운 접촉을 원하게 되었다. 이 의지는 서비스 회사에 전해져 trackback기능은 강화되어 에로사항이 꽃피는 일이 없어졌으며, XML을 이용한 RSS의 지원으로 인해 수집기만 있으면 어떤 – 곳에 소속된 – 블로그라도 쉽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블로그의 사용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소속된 장소(회사, 서버 등)에 상관없이 다른 사용자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일종의 공공기관을 만들었다. 블로그코리아(http://www.blogkorea.org)와 같은 곳이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RSS의 기능을 이요한 일종의 사용자 주소 종합관리기관이다. 블로그코리아의 가입자 수는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한 수 더하여, 자신들이 가진 네트웍 계정에 직접 블로그를 개설하여, 서비스 제공 회사의 속내와 여러 제한에서 벗어나 운영의 자율과 독립성의 확보해 더욱 자유롭게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용자들도 있다.
  이런 곳도 있다. 미디어몹(http://www.mediamob.co.kr)이다. Blogger들이 1인 매체(media) 생산의 일등공신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이곳은 그런 1인 매체들로 하나의 거대한 portal을 이룬 곳이다. 이러한 매체전달기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가 불필요한 과정과 제한없이 사람들이 접촉하여 정보와 주제를 전달하고 그것을 순식간에 심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다시 말해, 즉시성있는 질의,답변 그리고 토론 따위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이루어지게 해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이웃 블로그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알게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얘기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그렇다. 이것은 TV에서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만한,  많은 미래학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던 인류사회의 미래 표본이다. 우리는 이미 무한 정보교류시대의 초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말 그대로 미래에나 있음직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의식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들 모두가 미래로 가는 길을 걷고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꿈꾸던 미래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1번 타자다.


(10/23/2004)


  이 글은 아마도 series. 물론, 일정하게 올린다고는 장담 못하지만 말입니다;;
  trackback환영합니다!

오늘도 좋은하루♡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 힘낼게!”
  나는 어느새 중얼거리고 있었다.
  …….

  D&D  Ver. 0.57
  —–
  나오의 좋은 하루 머그
  나오의 자필 스케치가 그려진 머그컵.
  마비노기를 처음 시작하면 받게 되는 여행자 가이드에 있는 바로 그 나오가 직접 그린 스케치다. 나오의 그림 밑에는 “오늘도 좋은 하루” 라는 글과 하트가 그려져있다.

  기본 아이템: 머그
  무게: 1.0
 
  특수 속성:
  사용: 유니크 파워 자체만 가능 무한 사용/하루
  사용: 클리어 시퀀서 무한 사용/하루
  사용: 이야기 하다 무한 사용/하루

  —–

덧) ‘유니크 파워 자체만 가능’과 ‘유니크 파워’의 차이를 잘 모르겠네요.

덧) ‘이야기 하다’는 아이템과의 대화가 맞던가요? ‘_’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1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는 이유는 비록, 역사의 절반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불변하는 진실이기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기회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기회는 올 때 꽉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아니,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다가가려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회는 만드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회는 어디선가 다가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행한 일의 인과가 나아가고 나아가 기회라는 이름으로 멀리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
하나님을 본 적은 없어.
만약 하나님께서도 소원이 있으시다면 누구에게 빌어야하지?
소원을 간직한 채 밤마다 별을 올려다봤자 별똥별은 떨어질 생각을 안해.
그러니까 별똥별에게 소원을 비는 건 이루어지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 소원은 분명 이루어질거야.
난…!
난 이 별똥별을 기다려왔으니까!


– ‘톱을 노려라 2’  第1話 中 –


  최소한 이렇게, 스스로 다가가…….
  스스로 일어나 다가가 쟁취해야 합니다.
  나아갑시다, 여러분.

사랑은 없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어도 사랑을 쫓는 사람(사랑 타령이 아니다)을 가끔씩 보게  되면 나는 그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부여하는 특별한 의미를, 이미 깊이 있는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탐구한다.
 어떠게 보면 긴 인생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을 살 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요즘, 그들을 Innocence한 분류로 넣어야 할가 고민 중이다.

  사람은 항상 남과 다른 자신 만이 소유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가? 가장 손쉽게 연구하기 쉬운 방법은 소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대세처럼 말 끝마다 외쳐되는 사랑이 아닌,  옛부터 소위 이상적인 사랑으로 인식되는 방식을 행하는 자들을 그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많은 수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었다. 그들의 사랑(?)과 그 근원을 찾아 역으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중도 하차. 언젠가 계속 –

지구

  확실히, 지구의 인력이 끌어 당기는 것은 물리에만 속하는 것이 아닌 듯 하다. ‘지구는 피를 부른다.’라고 뭐 애니메이션에서의 말 처럼 지구는 사람의 영혼 또한 끌어당기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되기도 한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이 중력우물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나같은 존재라도 한없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영혼마져 끌어당기는 인력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을 넘어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뿐일 것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

과거의 이야기(유치원적 이야기)

  유치원 다닐 적 어릴 때 얘기다. 이사가기 전, 큰 집에서 살아갈 때였으니 6~7살 때이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공부를 시키셨다. 그래서 눈높이 수학도 회사에서 설정한 교육가능 나이도 2년이나 앞서서 배웠고(내가 전국에서 최초로 유치원생으로써 국민학교 과정을 밟은 아이다. 당시에 눈높이에는 유치원 교육과정이 없었다.), 이야기 책도 읽고, 문제은행도 풀었던 듯 하다. 맞으면서 배웠다. 울면서 배웠다. 산수를 배울 때 먹을 것을 볼모로 배웠고, 도덕문제에서 비맞은 태극기 처리 방법을 몰라 혼나며 울었고, 구구단을 못외웠다고 식탁 구석에 몰려 맞았다. 그런 일은 흔했다.
  그녀가 말하곤 했다.  “7살에 학교가면 어쩔뻔 했어? 이런 것도 모르면서!”
  나는 생각했다. “7살에 학교에 보내달라고 한 적 없는데..”

  지금 문뜩 어릴 적에  내 마음 속에 선명하게 남은 사건 하나가 생각났다.
  밤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 이야기 책을 읽고 있었다. 옆에서는 어머니가 읽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읽다가 글자가 틀리면 맞는다. 맞기 싫다. 잠시라도 읽다가 멈추면 읽지못한다 의심을 받고, 추궁을 받는다. 계속 읽어야 한다. 그러다 장이 넘어가면 책장을 넘길 때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런데 전번 장을 읽고 나서 숨을 고르지 못했다. 숨이 찬다. 목이 탔다. 결국 나는 결정했다. 한 문단이 끝나고 대사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숨을 쉬기로 했다.
  “휴~”
  나도 놀랬다. 빨리 읽지 않으면.. 나는 곧바로 대사를 읽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에게 손이 날라왔다.
  “여기에 ‘휴’가 어디있어!”
  울었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울면서 읽었다. 멈추면 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 말 못했다. 바보였다는 생각이 든다. 겁나서 말하지 못했다.
  끝없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숨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이해해주지 못한다. 그녀는 내가 책을 읽고, 문제를 풀고, 공부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나기 매우 쉬운 존재다. 가벼운 말 한 마디에도 상처받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나의 가족은 그런 점을 모르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가족에 무관심하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물리력이 관심인 줄 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성본능을 사랑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사색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나에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진짜 교육은 하지 않았을까. 그 빌어먹을 의미없는 지식만을 쌓게 만들었을까.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왜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고 결과론적 방법만을 가르쳤을까. 솔직히 말해 저주스럽다.
  어떤 이들인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술쳐먹고 들어와서 어머니를 때려도 미워할 수 없다.’와 같은 말. 결국에는 부모님이기에 싫어도 미워할 수 없다 한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행위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너무나도 미성숙했다. 그래서 종종 마음있는 부모와 그의 아이를 볼 때마다 너무나도 부럽다.

 인생살이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나의 마음 속에는 나의 나약함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빗발치듯 하다. ‘왜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까.’,’이렇게 했었야 했는데.’,’내가 조금만 더 강인했더라면 그대항할 수 있었을텐데.’. 가슴을 죄는 듯한 고통이 나를 속타게 만들고 순식간에 슬픔의 나락으로 몰아 넣는다. 쓴웃음을 짓는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허용치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하지만 상처는 낫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는 한 평생 낫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도 잊혀지지 않으리라.

  내가 결혼을 하리라고는 생각치 않지만 나같은 딸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마 능력있는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까 한다. 자녀교육은 내가 직접하고 싶다. 내가 직접 사고는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며, 문제가 생겼을 경우 강하게 대처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나의 아이가 나같이 내면이 나약하여 자신이 행하지 못했던 행위에 대하여 마음 속에 상처가 나고, 그로인해 한 평생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자유를 가르치고 책임을 가르치며, 의지를 내세우고 의지에 맞설 수 있는 강인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 하지만 강요해선 안되겠지. 자유, 정의.

  정말이지 나같은 딸 아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욕심이다…….

왜?

  버진을 ‘버린다’. 동정을 ‘버린다’.
  솔직히 난 이해가 안간다. 왜 ‘버리는거’냐고???
  난 그 표현이 상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싫다. 그리고 그걸 ‘버리지 못한’ 사람에 대한 대우 풍토도 생겨나는 것이 짜증 난다. 버린다는 표현을 듣자니 정말 犬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 간의 교제에서 성관계에 반대한다거나 혼전순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성욕이 인간의 생리적 욕구라는 것과 쾌락을 즐길 권리는 본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소위 종교를 가진 사람과 금욕적 도덕관을 가진 이들이 사회에 순결을 ‘강요’하곤 하지만, 현 사회의 인간은 자유와 권리를 해석할 줄 안다. 마땅히 개무시해줄 만하다.
  하지만 이 자유주의가 어설픈 자유를 말하는 이들에 의하여 점점 역전되고 있다. 자유를 마음 껏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은 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잃다’, ‘바치다’라는 표현이 지금은 ‘버리다’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에.. 말하려는 바가 흐려졌는데, 결국 말하려는 바는 동정인 자들에 대한 우월감을 표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멍청한 자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동정이건 아니건 상관할 바가 아닌데 말이다.